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대검살육 === [[https://youtu.be/7pn_VWChiEo?t=554|계엄군이 땅바닥에서 대검을 주워 장착하는 모습]]. [[파일:대검2.png|width=480]] [[파일:대검1.png|width=480]] [[파일:대검3.jpg|width=480]] [[파일:iF98Y2i.jpg]] [[파일:UOhter8.jpg]] [[파일:e7WV0pv.jpg]] [[파일:kdH9wot.jpg]] [youtube(I5cm2LqvLHY)] >그런데 갑자기 "악"하고 비명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보니까 쓰러져가지고 공수부대가 허벅지에서 대검을 뽑는 장면이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니까 늦게 간다는 이유 가지고 빨리 가지 않는다는 이유를 가지고 공수부대가 와서 찔러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제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어요. >---- >1989년 2월 23일, 광주특위 제29차 회의 청문회, 이광영의 증언 中 {{{#!folding ※ 대검 관련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4> ''대검 관련 사망자 명단''[* 검찰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하언남, 최승기, 김인윤, 이인선, 최미자 등이 대검에 찔렸고, 8명(위의 표 참조) 정도의 사망자 시신에서 대검으로 인한 상처가 있음이 밝혀졌다.] ||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888400149470265346|손옥례]]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936493398172643328|권근립]]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889333415702667266|윤개원]]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936498350337114112|김평용]] ||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936499941291069440|박종길]]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898547756607782912|민병렬]]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897302693823135745|허봉]] ||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889321116992380928|김경환]] ||}}} 계엄군은 진압 첫 날부터 대검을 사용했다. 전교사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1980. 5.18'을 따르면 대처 상황 중 수습 및 작전에 '7[ruby(空輸隊 銃劍鎭壓, ruby=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있고, 안기부가 1985년 작성했던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라고 써져있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3쪽.] 계엄군들은 대검을 구비하고 다니면서 M16 소총에 끼워서 붙잡은 시민들을 찔러댔다. 군인들은 심지어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원이 칼을 던지기도 했다.[*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이로 인해 자상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5월 19일[* 증언에 따라서는 5월 20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최미자(19)는 친구를 만나러 가던 도중 저녁 8시 30분경 남광주 연탄공장을 지나다가 공수부대와 대면했다. 그녀는 막다른 골목으로 숨어 한 집에 숨었지만 곧 들키게 되었다. 군인들은 그녀를 군화발로 차고 짓밟았으며, 마침내 대검으로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아야 했다.[* 가슴을 대검에 찔렀다는 그녀의 부상 사실은 이후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퍼지면서 "계엄군이 대검으로 여자 젖가슴을 잘라버렸다"는 소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위 동영상에서 의사가 증언하고 있는 '대검에 찔려서 온 여자'가 바로 그녀이다. 5월 20일~21일에는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막아선 시위대에게 대검을 썼다. 대표적인 희생자는 광주역 앞에서 죽어있던 허봉 씨로, 그는 좌측 전두부가 대검에 찔린 상태였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80쪽.] 5월 22일 전교사 연병장에선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 연행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에 후송됐는데 몇 시간 뒤 결국 죽었다고한다.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 현장에서 있던 계엄군이 직접 목격하고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다 증언한 사실이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는데 '''자신한테 대들고(!) 술냄새가 났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군기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확인해 보니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936490460641558529|전재서]] 씨는 22일에 국군통합병원에 도착하고 23일 새벽 5시 20분에 죽었는데, '우측 두부'(귀 뒷부분)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5. 22.경 전교사 연병장에서 공수부대원이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의 왼쪽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 준장과 전교사작전참모 백남이 대령 등이 목격했다고 우리 위원회 면담 과정에서 증언했다. 김순현 전투발전부장에 의하면 그 부상자는 헬기로 곧바로 광주국군통합병원 으로 후송되었으며, 몇 시간 후 병원장에게 확인한 결과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공수부대원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자신에게도 대들었으며 술냄새가 났다고 말했다. 우리 위원회는 김순현 전투발전부장 등의 진술을 확인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조사했다.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는 총 15명이었다. 검시 후 이 중 1명은 가족들에게 양도됐고, 14명은 전교사 내에 있는 101사격장에 가매장됐다. 광주국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던 사망자들 중 자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https://twitter.com/518inManinbo/status/936496235329961984|송정교]], 전재서가 있다. 송정교는 24일 송암동에서 사망했다. 전재서는 검시참여 결과 보고 에 5. 22. 21:30에 앰뷸런스로 통합병원에 도착한 후 5.23. 05:20에 사망했다고 기록됐다. 그의 사인은 우측 두부(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 같이 적혀있다.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4」 조선대에선 연행자를 대검으로 찌르는 일도 있었다. >당시 조선대에는 종합운동자에서 공수부대가 주둔하면서 구체육관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구체육관에는 군인들에게 잡혀온 학생들이 기합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병원 주변에 전선이 널려있어 한전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전선공사를 하던 중 환자 2~3명을 데리고 왔다. > >한전 근무자들은 구체육관에서 잡혀온 학생들이 기합을 받던 중 다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응급실에 데려왔다고 했다. 그 중 한 환자는 하퇴부에 칼에 찔린 상처가 있어 치료하니 환자의 의식 상태가 바로 회복되었다. 아마 쇼크 상태에서 실려온 것으로 보여져 수액 처치, 진통제 투여, 상처 봉합 후 입원 치료했다. 치료하면서 이야기 해보니 한양대에 다니다 휴학계를 제출하고 내려왔는데 계림동 파출소 앞에서 잡혀 조선대로 끌려 왔다고 한다. 당시 구체육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 기합을 받았고 기합의 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기합 도중에 대검에 찔렸다는 것이다. >---- >하상호(조선대병원 진료부장. 당시 조선대병원 [[정형외과]] 레지던트 4년차), 대검에 찔린 환자,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189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